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일곱 번째)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일곱 번째)
(안면도 해변 길, 2014. 8. 23-24)
瓦也 정유순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태안반도의 남쪽 끝으로 길게 뻗어 나와 천수만을 이룬 ‘태안곶’이었는데 조선 인조 때 이곳 감사였던 ‘김유’라는 사람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뱃길을 새로 내어 지금 연육교가 들어선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창기리’를 끊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 되는 큰 섬이 되었다.
이 ‘안면 땅’을 섬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고려 때부터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를 물길로 연결하여 백오십리가 넘는 뱃길을 십리가 채 못 되는 뱃길로 바꾸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번 번히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1968년 연육교가 개통되면서 다시 배를 타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어 버스를 타고 이 땅의 남쪽 끝 ‘영목항’으로 간다.
<영목항>
조선조 때는 나라에서 소나무를 비롯하여 제목으로 쓸 나무들을 섬 전체에 심고 산지기 서른 명쯤을 이곳에서 살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면도에서는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 살 수 있을’ 만큼 산림이 울창하여 숨어 살아야하는 사람들이나 전쟁후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이곳 소나무는 기후와 토질 덕으로 옹이가 없이 곧게 자라 경복궁을 복원할 때 많이 썼다고 하며, 해방 전에는 낮에도 어두울 만큼 소나무가 울창했었으나 해방 후에는 무분별한 벌목으로 옛날의 그 모습은 찾기 힘들다고 한다.
<안면도 솔숲>
영목항도 어느 어항처럼 아침에는 한가로이 배가 떠 있고 여유롭다. 동쪽으로는 보령 땅이 안개 속으로 흐리게 보이는데 ‘아름다운 자연과 빛의 조화’를 이루겠다는 ‘영목솔빛대교’는 그곳을 향해 약6km의 길이로 길게 다리를 뻗고 있다. 그리고 항구 앞 ‘시루섬’을 디딤돌 삼으면 남쪽으로 방파제처럼 누워 있는 ‘원산도’를 한걸음에 갈 것 같다.
<영목해변>
<영목솔빛대교 조감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니 ‘황포항’까지 15.5km의 이정표가 보인다. ‘태안 해안 길’ ‘7코스 바람 길’이 역(逆)으로 시작되는 곳이다. 횟집과 젓갈 가게 등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바다를 품에 안은 것처럼 사리 때 마치 마을이 바닷물로 꽉 차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붙여진 만수동(滿水洞)이 반긴다.
<만수동 갯벌>
해안경관이 아름다운 가경주(佳京州)는 마을이 아늑하고 자연이 수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마을 앞 바다를 오가는 배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같이 살던 사람이 다 떠나고 몇 안남은 주민들은 그물채 퍼 올려 진 꽃게 따기에 손길이 분주하다.
<가경주 해변>
주꾸미 낚시로 유명하다는 ‘조개부리마을(옷점마을)’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농촌과 어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전형적인 농어촌마을 같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온 주민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한 ‘조개부르기’ 행사를 전승하는 마을이라 ‘조개부리마을’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이 마을에 있는 어항이 ‘옷점항’이다.
<조개부리(옷점)마을 갯길>
옷점항에서 만(灣)을 따라 조성된 제방 안쪽에는 논이 잘 형성되어 있고, 바다 쪽으로는 갯벌이 발달되어 있다. ‘고남제방’ 끝 지점에서 시작하는 ‘바람아래’해변은 사막과 같은 모래언덕 아래로 바람도 비켜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용(龍)이 승천할 때 큰바람과 조수변화를 일으켜 지금의 모래사장과 둑이 형성 되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멸종위기종 2급인 ‘표범장지뱀’이 서식하고 있어 특별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바람아래 해변>
바람아래 해변 길을 따라 구릉(丘陵) 너머에 장곡(長谷)해안이 기다린다. ‘장곡’은 ‘장돌’과 귀골(龜-)의 두 마을이 합쳐 만들어진 이름이란다. 장돌은 마을 한복판에 크고 평평한 돌이 놓여 져 있어 유래되었고 귀골은 마을의 지세가 거북을 닮아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곡해안>
또 하나의 힘겨운 언덕너머에 ‘장삼포해안’이 있다. 조용한 바닷가의 정취가 물씬 풍겨 가족단위로 나들이하기에 안성맞춤 같다. 그리고 길고 넓은 해안선을 걸으며 수려한 경관을 감상하기에 딱 좋은 곳 같다.
<장삼포 해변>
운여(雲礖)라는 이름은 앞바다가 넓게 트여 파도가 높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이 구름 같이 장대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운여의 ‘여(礖)’는 썰물 때는 바닷물 위에 드러나고 밀물 때는 바다에 잠기는 바위를 말한다. 운여해안의 산길을 따라 황포방조제를 지나 황포항에 도착하여 오전의 여정을 끝낸다. 해변 길의 무화과나무는 풍성한 가을을 벌써 기다린다.
<운여해변>
황포(黃浦)는 홍수로 인해 갯벌(개)에 누런 황토물이 흘러 ‘누런개’로 불리다가 ‘황개’로, 다시 ‘황포’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해안을 따라 설치된 방조제로 인해 민물의 유입이 적어 황토물의 흐름을 볼 수 없다고 한다. 황포에서 꽃지까지가 ‘태안해안길 6코스 샛별 길’이다.
<황포 해변>
오후에는 지금까지 우리 땅 걷기를 함께한 아내가 발이 아파 버스로 이동하고 혼자 걷는다. 걱정이 앞서서 그런지 둘이 걷다가 혼자 걸으려니 힘이 부치는 것 같다. 황포항에서 국사봉(107m)자락을 돌아 날선 해안 자갈길을 ‘무당 작두 타듯’ 어렵게 건너니 ‘샛별’해안이 고운모래와 함께 포근하게 감싸준다. ‘샛별’은 자연간척지로 ‘샛벌’로 불리다가 ‘샛별’이 되었다고도 하고, 자염(煮鹽) 생산지로 ‘새벗’이라고 불리다가 “샛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샛별 해안>
세곡미(稅穀米)를 나르던 배들이 하도 많이 침몰하여 쌀 썩는 냄새가 난다는 ‘쌀 썩는 여(礖)’가 물속에 잠긴 채 보이는데 쌀 썩는 냄새는 바람에 다 날려 갔나보다. 고을 수령들이 국고미를 착복하기 위해 선장과 짜고 사고로 위장 보고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일부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는 나라의 운명을 가른다. 길가의 배롱나무와 설상화 수국 등은 가는 여름이 바쁘다.
<쌀썩은여 해안>
조수가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만(灣) 특유의 지형을 가진 ‘병술만’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주둔했던 군사요충지였다. 해안에서 자라목처럼 길게 서쪽으로 뻗은 구릉(丘陵)을 넘어 곶을 지나니 ‘꽃지’해변이 길게 늘어선다. 그 곱디고운 꽃지의 모래는 해안도로가 건설된 때문인지 거칠게 보인다. 방포항 사이에 있는 할미할애비 바위는 낙조의 빛에 반사되어 옛날의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도 조용히 보낸다.
<병술만>
<꽃지제방도로>
<할미할애비 바위>
천수만청소년수련원에서 곤한 밤을 보내고 홍성군 서부면 서산방조제로 가는 입구에 서 있는 ‘당산소나무’ 앞에 잠시 발을 머문다. 다섯 개의 큰 가지가 갖은 풍상과 고난을 품은 듯 하늘을 떠받치며 위풍당당한 소나무가 당산을 지킨다. 안녕과 풍어(년)의 고사를 지낸 술과 음식이 소나무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천수만입구 소나무>
서산방조제를 지나 안면도 동쪽에 ‘안면암’이 위용을 자랑하나 고풍스러운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외양의 치장 보다는 내면의 신심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물 빠진 바닷길을 따라 암자 앞의 ‘여우섬’까지 걸어간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황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풍어제를 올리는데 “칠산 앞바다에/조기도 많고/우리네 주머니에 돈도 많다/순풍에 돛달고/만경창파로 떠나세/돈 실러가세 연평바다로/에헤 어어쿵 에에 어어쿵”하는 ‘황도 풍어타령’이 갯바람 타고 들려오는 것 같다.
<안면암>
<여우섬>
어제 일정을 마감한 꽃지해변에서 다리 건너에 있는 ‘방포항’에서 둘째 날 걷기를 시작한다. 이곳부터 백사장항까지가 ‘태안해안길 5코스 노을 길’이다. 이곳에는 중국에서 건너 온 ‘모감주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138호)’가 있다. 제목이나 땔감으로는 별 쓸모가 없으나 열매로 만든 염주는 꽤 귀한 것으로 친다고 한다.
<모감주나무 군락지>
방포항에서 거친 해안자갈길을 지나 방포해변의 모래밭을 걷는다. 게들이 토해 놓은 모래구슬들을 밟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솔밭 사이로 들어선 팬션에서는 어젯밤이 곤했는지 늦은 기지개를 편다. ‘두애기해변’을 지나 ‘밧개해변’까지는 미끄러운 바다바위가 추호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깔려 있는 자갈하나하나가 날선 도끼 같아 더듬으며 걷는다.
<두애기 해변에서 밧개해변으로 가는 길>
분처럼 고운 모래가 가득한 ‘밧개해변’을 지나 전망대가 있는 언덕너머에는 ‘두여’→‘안면’→‘기지포’→‘삼봉’→‘백사장항’까지 해변으로 이어지는 모래밭은 환상이다. 바닷물에 발을 적시며 맨발로 걷는다. 백사장항의 어선들은 분주하고 ‘드르니항’으로 건너가는 ‘대하·꽃게다리’는 사람들이 신명나게 걷는다. 늦은 점심 후 태안마애삼존불을 덤으로 둘러본다. 마애삼존불은 태안 백화산 중턱에 감실(龕室)모양으로 암벽에 새겨진 6세기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마애삼존불이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불과는 달리 중앙에는 보살, 좌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 우에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좌우의 여래상은 큰 반면에 중앙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작아 일보살(一菩薩) 이여래(二如來)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밧개 해변>
<꽃게랑대하랑다리>
마애삼존불 맞은편에 있는 ‘태을동천(太乙洞天)’이란 글자가 눈에 띤다. 태을(太乙)은 도교사상에서 하느님이나 옥황상제를 뜻하며, 동천(洞天)은 하늘아래 첫 동네로 아름다움을 의미하니, 이곳은 하늘과 통하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인가 보다. ‘태을동천’이란 글자 위에는 ‘가락김씨’ 문중의 족보를 보관 했다는 수장고가 눈에 띤다.
<태안 마애삼존불>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길옆의 ‘백조암’이란 큰 바위가 내려올 때 보인다. 왜 백조암이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이름하고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바위 뒤로 돌아가 아래를 굽어보니 눈에 보이는 경관은 일품이다. 노을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이 찾는 명소라고도 한다.
<태을동천>
저승사자도 걷는 사람은 바쁘고 할 일이 많아 처다 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오늘도 열심히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서해안 걷기 일곱 번째를 마감한다.
<백사장항>